2020 예외상태 전시서문


경계에 관한 소고(小考) 

 1. 장애(disorder)는 언제나 타자다. 공동체의 삶은 생각 외로 견고하기 때문에, 객체는 경계를 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만이 미덕으로 여겨진다. 장애가 우리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서 자신의 영역에 서 있을 때만 우리는 이를 존중한다. 이는 호혜(互惠)로 포장된 명백한 멸시다. 이 기울어진 관계를 우리는 차별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장애를 설명하는 단어들을 떠올린다. 불편함, 결여, 부족함, 방해. 그 어떤 단어도 동등한 의미가 없다.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흔히 '정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제한다. 정상과는 다른 불편함, 정상에 비해 부족한, 정상적인 삶을 살기에는 방해되는 등 독립적으로 정의되지 않는 의미다.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 정상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아무도 명쾌하게 대답하지 못하지만 어리숙하게 합의된 무의미한 기표다. 

이 명확하지도 않은 언어들이 우리의 인식구조를 형성한다. 알량한 도덕감은 매사에 우리를 침묵하게 한다. 장애와 관련한 논의들을 입에 올리거나 비판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배려로 시작한 행위들이 더 명백한 경멸이라는 것을, 모두 알지만 아는 체하지 않는다. 무언가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의 의미는 그것을 주제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삶에서 주제로 다룰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장애를 말하는 일은 당사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락된다기보다 미루는 것에 가깝다. 이상한 눈치게임이다.
2. 나에게 장애는 좀 더 경험적인 것이다. 불편이나 결여 정도의 단어로는 해명되지 않는다. 장애는 누군가에게 구체적 삶이며 동시에 그 주변인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실천을 요구한다. 장애인의 생활은 오롯이 개인의 것이 될 수 없다. 주변의 인생이 모두 덧붙여진 커다란 덩어리에 가깝다. 그들에게는 눈을 뜨는 순간 모든 것이 도전이다. 문지방을 넘어서는 일조차 버겁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더디다. 장애를 돕겠다는 제도들이 오히려 장애인을 옥죄기도 하고, 배려하는 시선들이 못 견디게 괴롭기도 하다. 봉사자와의 만남의 기저에서 간혹 작은 동정심이라도 발견하는 날에는 밤새 잠을 이루기 어렵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장애인 개인의 잘못으로 돌아온다. 마치 처음부터 답이 정해져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에게 장애는 언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지체장애 때문에 혀를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는 동생이 뜨거운 국물을 먹다 혀를 데는 일, 따뜻한 설렁탕이 먹고 싶어 음식을 주문한 자신을 자책하는 이모, 소리를 지르는 동생을 의식적으로 쳐다보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황급히 주변에 사과를 하는 나, 식사를 채 마치지 못하고 식당에서 나와 계속 보이지 않는 허공에 욕을 하는 동생을 달래며 어정쩡하게 길에 서 있는 우리 셋이 바로 장애의 정의다. 복지관에 보내기 위한 장애등급을 받기 위해 주기마다 탄원서를 쓰는 일, 종종 사라지는 아이를 수소문하는 일, 정해진 날짜에 병원에 데려가고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이는 일들이 장애를 설명한다. 무수한 경험들 속에서 정당한 근거 없이 우리는 각자 자신을 원망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대상에는 우리가 나가기만을 기다리던 배려아닌 배려들은 빠져있다. 

유화수의 작업에서 장애물 놀이터는 장애 그 자체를 의미한다.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조차 시도할 수 없는 장애가 일상에 놓여있다. 나는 길을 걷는 장애인들의 유쾌한 발걸음에서 동생과 함께 서있던 황망한 어느 날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들의 걸음걸이를 응시하는 화면 밖의 내가 오만한 목격자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하게 된다.
3. 예술은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바꾸지는 못하지만 수면 위로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발언에는 무수한 윤리적 잣대가 가해진다. 선의를 의심하고 문제의식을 그 자체로 다시금 도마에 올린다. 작가들이 입을 떼기도 전에 자기당사자성이 발목을 잡는다. 마치 장애와 관련된 모든 활동의 권리와 책임은 장애인들에게만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장애와 관련한 활동들은 너무 오랜 시간 그저 그런 방식으로 지속되어 왔기에 때로는 식상한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 공익의 그림자가 너무 오래된 탓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내가 생각하는 예술의 역할은 한정적이거나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고유한 것이다. 잠긴 문제를 열 수 있도록 눈앞에 가져다두고 사람들의 인식구조를 변화시키는 것, 타자로써 대상화되었던 장애를 경계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추상적인 장애의 개념을 구체화시키는 그 모든 것이 예술만의 역할이자 영역이다. 그리고 이 때 예술에 주어진 발언의 자격은 그 누구에게라도 충분하다. 


『예외상태』라는 전시명에서 알 수 있듯, 장애와 관련된 주제는 언제나 외(外)에 머물러있다. 그러나 작가들의 시도는 이 주제를 다시금 사회구조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 원래 있었던 자리를 찾아주고자 하는 것에 가깝다. 구조의 한 켠을 새로이 만들어 내주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구조 안에 있었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들의 작업은 우리의 편견에 근거한 감정들을 촉발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유쾌하고 흥미롭다. 그러나 작업들을 보면 마냥 즐거울 수는 없다. 분명하게 마주해야 할 불편함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는 우리가 그냥 지나친 것들에 대하여 다시금 응시할 수 있도록 만든다.
4. 과학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을 명백하게 해명하는 것처럼 보이며, 바로 그 설명이 정상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기술은 인간 증강을 위한 통로를 만들었고, 그렇기에 장애인들이 기술을 통해 정상(이라고 간주되는) 신체를 획득하길 요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지양의 작업은 마치 옳은 가치로 여겨지는 정상의 의미를 되묻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중력을 느끼며 살아가는 특별한 사람들을 이상(異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단지 개별적인 나름의 경험들로써 우리의 곁에 존재함을 이야기한다. 장애를 결여가 아닌 다름으로 인정하자는 문장은 옳지만 실천하기 어렵다. 웅크린 뒷모습의 이미지들을 등진 채로 계단을 튀어 내려오는 장난감들의 연속된 움직임들의 리듬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그들 삶의 다양한 면면이 존재함을 느낀다. 


신체적 불편함이란 어떤 기준으로부터의 결여일까. 불편하다는 것은 단지 좀 더 많은 인내심과 행위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배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가끔 차별하지 않기 위해, 다름을 인정하기 위해 그들이 일정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간과한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타인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도움은 그 종류가 조금 다를 뿐이다. 그렇기에 전시가 말하고자 하는 장애에 대한 사회구성원의 책임은 특별하지만 차별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정상성이라는 개념에 매몰되지 않고 개개인의 삶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지속되어야 한다고, 어쩌면 이조차도 시시한 자만심일 수도 있겠다.
5. 장애를 다루는 예술은 대체로 몇몇 형식들이 정해져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장애 당사자가 직접, 자신의 경험을, 부당한 사회적 시선과 차별을, 극복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예술이 언제나 자신의 삶의 본질을 드러내는 작업에 천착한다는 점에서 이는 이상할 것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장애를 다루는 예술의 범주가 더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장애예술은 마치 경계 바깥에 존재하는 독립된 예술장르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타자화는 배려를 가장한 구획짓기다. 예술은 장애에 관해 더 많은 문제의식과 공감을 드러내야 한다. 인세인 박의 작업은 우리가 가진 부당한 우월의식에 일침을 가한다. 과거 신체 이형의 사람들을 눈요깃거리로 여기던 우생학적 태도를 솔직하게 비판한다. 아무도 직접 드러내지 않지만, 그들이 신체의 불편함을 극복하는 삶의 방식으로부터 위안을 얻는 오만함이란 얼마나 끔찍한가. 


 이번 전시에서 나는 장애를 설명하는 문장들을 읽어낸다. 장애는 경계 앞에서 서성이는 것이고, 우리 곁에 늘 존재하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 공동의 책임이다. 내 삶에서 장애는 그 어떤 의지와 상관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늘 타인의 삶에 대한 부채감에 시달리는 것이기도 했다. 전시는 그 어떤 감정적인 호소 없이 나를 위로했다. 위로라는 말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외롭지는 않았다. 

-천미림 2020.12











2020 그림을 그립시다 & 나는 아무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생각이 없기때문이다  전시리뷰


전시는 두 개다. <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림을 그립시다(Joy of Painting)〉, 지금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자기(自己)'야말로 가장 불확실할 것이다. '자기’가 뚜렷해서 권위를 지녔던 자들이 자신의 또 다른 자아 때문에 얼마나 곤욕을 치르고 있는지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나'는 정말이지 허구가 맞다. 그래서인지 한 작가의 개인전 두 개가 동시에 열릴 수 있었다. 인세인 박의 예술가 자아는 와글와글 왁자지껄한 MTV와 인터넷, SNS, 부캐 등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전시 분위기와 주요 매체만 다를 뿐 두 전시의 주제는 다르지 않다.
젊은 세대들에게 전범이나 참조물이 되는 것은 더이상 자연이나 권위 있는 작가, 두꺼운 책에 나오는 것도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선배들이 쌓은 기술을 바탕으로 고전적인 매체 고유 특성을 체현하는 방식도 여전히 유효하기는 하지만 전시장에서 대중문화나 비주류문화를 원천으로하는 작품을 보는 일이 더 쉬워졌다. 

인세인 박도 1990년대 EBS에서 방영해 대스타가 된 ‘그림을 그립시다'의 밥 로스를 내세워 현대미술을 설명하고 있다.(2층 전시, < 그림을 그립시다(Joy of Painting) >) 구식 텔레비전 화면 속 밥 로스는 돈 되기도, 그리기도 쉬운 그림을 그리자며, 이우환의 < 선으로부터 >를 파란 붓으로 긋기시작한다. 기이하게 굴러가는 미술시장에 대한 밥의 설명은 명쾌하고 친절하다. 조영남 씨는 현대미술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현대미술 작가에게도 현대미술이 어렵고 이상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작가는 추상의 대가(지만 가끔 자신의 그림도 헷갈리는) 이우환과 이발소 그림으로 폄하되기도하는 풍경화가 밥 로스를 묶으면서 이 둘의 예술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는 매우 닮아있음을 보았다. 밥 로스가 수시로 말하는 “참 쉽죠?”는 묘하게 공명한다. 서양화과 출신으로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은 작가는 밥 로스를 따라 그리며 '그림의 기쁨’도 덤으로 얻었다고 한다. 
1층과 지하로 이어지는 <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 정리되지 않고 우왕좌왕하는 소리와 노래로 덮인 전시장에는 그가 전시 제목만큼이나 관심 있게 지켜본다는 인터넷에 떠도는 문구와 영상, 인공지능 로봇 등이 등장한다. 픽셀은 깨지고 문구는 등장했다 사라지고 유령과 '바비걸'은 재생된다. 영원히 지속되는 '지지직' 속에 갇히는 건 소피아도 아니고, 유령도 아니다. “밈과 짤과 같은 서브컬처를 차용해 미디어에 기반을 두고 분출되고 확산되는 개인 및 사회의 욕망을 드러내고, 그 욕망들이 소비되고 활용되는 현대사회 및 자본주의의 구조를 해체하는 작업”이라는 설명은 꽤나 정확하고 멋들어지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써놓고도 전시 관계자들이 겸연쩍을 수밖에 없는 건 작가가 “선 몇 개 긋고 철학적 메시지를 넣어주면 평론가나 기자들이 그럴싸하게 포장하기도 하고 자기들만의 해석을 덧붙여” 준다는 걸 < 그림을 그립시다(Joy of  Painting)〉에서 밥을 통해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렇다고 그런 현상을 비꼬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현상 자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한다. 어쩌면 정말 아무 생각이 없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선동이나 계몽 의도는 확실히 없는 게 맞고, 어쨌든 꾸덕꾸덕하게 칠해진 〈Black(Stop, Play, Pause) >의 세계(현대미술과 광고영상의 세계)는 당분간 계속 굴러갈 것이다.

-배우리 기자 (월간미술 2020.8)












2020 그림을 그립시다 & 나는 아무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생각이 없기때문이다  전시리뷰


인세인박 개인전 <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와 < 그림을 그립시다 >(6. 25~8. 15 아라리오갤러리)가 동시에 열렸다. 그는 대중문화와 사회 이슈 전반을 가로지르는 폭넓은 관심사를 가진 작가다. 이번 전시에서 주목한 소재는 ‘짤방’과 ‘밈’. 영상과 회화라는 상이한 매체로 꾸민 두 전시는 각각 레트로 미디어의 감각을 밀어붙이고, 기존 미술시스템에 의심을 품는다.

한 작가의 두 개인전이 동시에 열렸다. 인세인박의 <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하 < 아무 생각 >)와 < 그림을 그립시다 >가 아라리오갤러리에서 개최된 것. 각 전시 출품작의 매체도 판이하다. 지하층에는 영상 및 미디어작업을 소개하는 < 아무 생각 >이, 2층에는 풍경화가 내걸린 < 그림을 그립시다 >가 펼쳐졌다. 인세인박은 무슨 생각으로 다른 콘셉트의 전시를 한번에 선보였을까? 전시 제목은 이목구비를 직직 그어놓은 멍한 표정의 ‘짤방’과 함께 유행했던 문구처럼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하지만, 작가에게 정말 아무 생각이 없지는 않아 보인다.인세인박은 심지어 전시마다 서로 다른 작가명을 쓸 요량이었다고.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의 ‘insane’을 활동명으로 사용하는 그가 떠올린 또 하나의 이름은 ‘다나까(danakka)’였다. “일본 만화 속 나랑 똑 닮은 캐릭터의 이름이자, 나의 오랜 별명이다. 20년 넘게 인터넷 ID로 사용 중이다. 이를 요즘 유행하는 ‘부캐’처럼 불러와 전시와 작가, 작품 사이에 써먹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부캐는 온라인 게임에서 유래한 신조어 ‘부캐릭터’의 준말로, 더 흥미로운 플레이를 위해 새로 추가한 캐릭터를 의미한다. 이 단어가 일상 영역으로 들어오며 ‘누군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인격체인 듯 행동할 때’를 가리키는 말로 재정의되었다. 실제로 두 전시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만큼 작가가 갖고 있는 관심과 시야의 폭이 넓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전략일지 모른다.

먼저 < 아무 생각 >을 살펴보자. 계단을 따라 지하층으로 내려가면 그린 스크린(green screen)을 연상시키는 녹색 커튼이 전시장 입구를 가로막고 있다. 커튼을 여는 순간 인세인박이 소환한 레트로 미디어의 세계가 펼쳐진다. 작가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구식 브라운관 TV, 컴퓨터 모니터를 주된 송출 장치로 활용했다. 화면에는 1990년대 MTV 스타일의 그래픽 영상, KKK단으로 변장한 작가가 등장하는 영상, 인간 여성을 닮은 AI 로봇을 조야한 그래픽으로 재구성한 애니메이션 영상 등이 반복된다. 작가가 직접 샘플링한 사운드는 전시장 여기저기 설치된 스피커에서 마구잡이로 흘러나오며 감각적 혼란을 가중한다. 비디오 플레이어의 재생, 일시정지, 정지 버튼과 마우스 커서의 아이콘을 형상화한 네온사인도 눈에 띈다.이처럼 < 아무 생각 >에서는 인세인박의 여러 작품이 저마다 존재감을 뽐낸다. 때문에 작품끼리 특정한 맥락은 이루지 않는다. ‘MTV 키드’라 자칭하는 그가 대중 매체의 문법과 감성을 오로지 감각만으로 관객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사실 난 서양화를 전공했다. 근데 졸업하고 보니 혼자 벽에 못 하나 박을 줄 모르더라. 조각과 출신 동료들과 함께 작업실을 쓰며 여러 도구와 매체를 다루는 법을 배워 나갔다. 흥미나 필요에 의해 하나씩 익혀서 그런지, 기술적 완성도가 완벽한 편은 아니다. 이 전시는 새로 익힌 영상 툴로 디지털 이미지를 갖고 놀기 위한 튜토리얼이자 그 결과물이기도 하다.” 전시장 바닥 군데군데 뿌려진 작고 네모난 타일 또한 비트 단위의 픽셀로 이뤄진 디지털 이미지를 작가 나름대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2층 전시 < 그림을 그립시다 >는 인세인박의 첫 회화 개인전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출품작 모두 작가 자신의 오리지널 회화는 아니다. 흔히 ‘밥 아저씨’로 알려진 밥 로스의 그림을 따라 그린 모작이기 때문이다. 밥 로스는 1994년 EBS에서 방영된 TV 프로그램 < 그림을 그립시다 >로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다. < 그림을 그립시다 >는 밥 로스가 빠르고 유려한 솜씨로 풍경화를 그리며 ‘그림을 잘 그리는’ 방법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유년 시절 이를 애청했던 많은 이들이 그를 일종의 ‘밈(meme)’으로 부활시켰다.
인세인박도 < 그림을 그립시다 >를 기억하고 있었다. 전시를 준비하며 밥 로스의 작법을 충실히 모방했다. 주로 미국의 웅장한 자연 풍경을 대상으로 삼았던 밥 로스의 그림에서 작가가 선택한 분홍빛 하늘은 묘한 이질감을 준다. 캔버스 하단에는 ‘Insane Bob’이라는 서명을 적어놓기도 했다. 전시장 한 구석에는 ‘그림을 그립시다’의 한 에피소드가 재생된다. 그런데 그 내용에 자세히 귀 기울여 보면 뭔가 이상하다. “오늘은 돈이 되는 그림을 그려볼 거예요.” 화면을 들여다보면 역시나 익숙한 추상화 한 점이 합성되어 있다. 이우환의 대표작 < 선으로부터 >다. 정확히는 이 그림도 밥 로스로 분한 인세인박이 이우환을 모방한 것이다.
1990년대 TV를 보며 자란 세대에게 밥 로스는 생애 처음 만난 화가다. 현대미술 문외한이라면 이우환을 잘 모를 수 있다. 그래도 밥 로스와 그의 풍경화만큼은 안다. 인세인박은 이러한 상황에 의심을 품는다. “나는 미술시장과 담론 모두 특정 인물, 그룹의 주도로 이뤄져왔다는 사실에 다소 부정적 입장이다. 그래서 서울의 대표적인 화랑가 한가운데에 소위 ‘이발소 그림’을 걸어보고 싶었다. 심지어 이 모작이 팔린다면, 누구의 그림이 팔리는 것일까? 인세인박일까, 밥 로스일까. 아니면 ‘인세인 밥’일까? 이 친숙하고도 낯선 그림을 보며 우리가 속한 미술시스템을 재고해보려 했다.”
밥 로스가 종종 내뱉는 “참 쉽죠(That easy)?”라는 말도 어느덧 친숙한 유행어가 된 지 오래다. 작가는 특히 밥 로스가 실수를 저지른 뒤 “행복한 사고가 일어났군요. 즐겁게 그리면 됩니다. 그게 전부예요.”라며 아무 일 없다는 듯 덧칠하는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이 프로그램의 영문 원제가 ‘그리기의 즐거움(The Joys of Painting)’이다. 그렇다면 인세인박에게 미술은 과연 즐거운 일일까? “심각한 매너리즘에 빠진 적이 있다. 밥 로스의 말들이 마치 나에게 하는 것처럼 들렸다. 미술 없이 못 살 것 같았던 날들도 있었는데 말이다. 예전에는 욕심도 계획도 많았다면, 이제는 조금 내려놓았다. 혼자 재밌게 갖고 논 것을, 기회가 된다면 잘 보여주기.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행복한 미술이다.”

-조현대 기자 (아트인컬처 2020.8)












2020 Joy of painting & I have no idea, because I have no idea Solo exhibition review

In times of uncertainty, the human brain has a tendency to seek reprieve by deliberately detaching from reality. While exercise and entertainment have historically served as palliatives, the most engrossing diversion from today’s postmodern malaise is the internet. Pseudonymous media artist Insane Park’s double solo exhibition at Arario Gallery in Seoul was a timely endorsement of escapism for those seeking sanctuary from the global pandemic.In the gallery’s main space,“I have no idea, because I have no idea” encompassed an immersive media environment that bombarded viewers with audiovisual elements. Videos appearing on an array of outdated TV and computer monitors, as well as projected onto the walls and ceiling, overlapped and competed with each other within the darkened gallery, which itself served as an IRL proxy for the vast and fragmented nature of the worldwide web. Park’s videos are primarily straightforward and reductive renderings of single motifs:either in the form of textual epithets—such as “In order to shine we have to burn,” which scrolls across a Windows 98desktop—or digitally mediated activities, including gameplay on an early-generation version of Tetris. And yet, this lack of pretense in expressing one-dimensional evocations of millennial ennui imbues these videos with a collective potency that transcends discrete logics of interpretation: their scattershot presentation demands passive, browsing-based engagement, devoid of intention or hierarchical preconceptions.Of these works, the more compelling retain an experimental quality. In the three-channel video 20th Century Boy (all works 2020),the artist appears to traverse three adjacent monitors, from a flickering black-and-white film format to a color-distorted analogue video to a pixelated digital clip. In Barbie Girl ,the disembodied head of the humanoid AI robot Sophia sings a popular late-1990sEuro-dance hit premised upon role-playing as a children’s doll. Such desires to breach alternate dimensions of time and space through the medium of video—and to transform oneself in the process—speak toPark’s longstanding interest in dynamics of representation and perception within the framework of mass media.These themes dovetailed with Park’s second exhibition,“Joy of Painting,” which paid tribute to American landscape painter Bob Ross, whose TV show of the same name was a public television mainstay int he 1980s and ’90s. Ross has since developed a cult following worldwide, largely due to the proliferation of online videos and memes that have introduced his new-age artistic attitude to younger generations. Presented in a separate gallery, some 13canvases by Park depict Ross’s signature saccharine landscapes, mounted in heavy gilded frames and cordoned off by velvet ropes. Such deliberately pretentious installation schematics asserted a confounding contrast to the populist aesthetic of the paintings themselves:attempting to invest otherwise trivial compositions with the contextual trappings of “high art” appeared aspirational at best, evincing an attempt at value-by-association. A video work accompanying the paintings on view appropriates footage fromRoss’s TV show, overdubbed with a Korean-language voiceover offering a sardonic step-by-step guide to becoming a successful Korean abstract artist. Rather than undertaking an idealized landscape in this fabricated episode, Ross appears to paint a canvas in the style of Lee Ufan, one of Korea’s representative modern artists, whose characteristic minimal abstract paintings consist of vertical blue lines in single, uninterrupted brushstrokes.Peppered with classic BobRoss aphorisms (“You have to be happy when you paint, that’s all that matters”) while explaining how to easily create artworks that sell for lots of money, the video’s voiceover thematizes the polemics of creativity and commerce as coexisting pursuits. Here, Park sheds light on a dichotomy that so many contemporary artists struggle to reconcile, submitting a subversive critique of the art market and its subjective criteria for the socially determined value of art. Moreover, the narration amounts to an escapist soliloquy that activates desires for acceptance and validation from the contemporary art establishment through gratuitous imitation. Ultimately,Park’s concurrent exhibitions revealed the futility of deriving succor in such strategies:whether through pixels or paint, role-playing and appropriation will always operate at an ontological remove from substantive discourse.

-ANDY ST. LOUIS (Art asia pacific 2020.6)











2020 Joy of painting & I have no idea, because I have no idea Solo exhibition text

Arario Gallery Seoul opens a two-part solo exhibition I have no idea, because I have no idea. and Joy of Painting by Insane Park. Through the continual experimentation of collecting, reproducing, and transforming images made by and for mass media, the artist aims to portray and reveal the essential problems hidden behind the duality of cultural experiences faced by the current generation.
 
The first of the two exhibitions, I have no idea, because I have no idea., is comprised of installations and video art that appropriate memes, which oversaturate the internet, in an art historical narrative. Moving images and GIFs, even as short as 20 odd seconds, instantaneously capture the emotions and thoughts of a fleeting moment by referencing various modes of online communication. Through his body of work, Insane Park highlights the positioning of memes as a social trend through exponential reproduction and distribution, often taken out of context. This process guides the audience to challenge the tolerance of today's vapid societal structure, which encourages industries, founded upon material desires of individuals, to spread and flourish through the channel of mass media.
 
By parodying the widely popular TV program of the same title, Joy of Painting-the second of the two exhibitions-humorously satirizes the value of art determined by the art world system. Insane Park collages scenes from the program in order to fabricate an episode in which Bob Ross, American painter and original host of the show, gives an "easy-to-follow" tutorial on becoming a Korean Abstract artist. The works on view, which have been created by borrowing from and imitating elements of the show, pinpoint the mechanism of the art market through the language of memes. This also reflects the artist's intrigue in questioning the role of art in the contemporary art market within the structure of capitalism.
 
Insane Park incorporates pop culture and internet slang as artistic devices in his new body of work and recalls these subtle references within the context of a contemporary art exhibition. GIFs and memes, which imitate and duplicate fragments of the past, are overlapped with the detached and flat interactions of today in order to elucidate the contradictions and problems faced by society. The artist not only speaks of the reality in which humor and hatred, aspiration and desire, commodities and trash, and art and memes coexist and but also confronts the instantaneous and unfiltered consumption of the dichotomy of reality.


-ARARIO gallery











2020 아라리오 갤러리 개인전
인세인박 x 장진택 
예술의 의미를 채굴하라

2020 그림을 그립시다 & 나는 아무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생각이 없기때문이다  전시서문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그리고 미디어를 위해 만들어지는 이미지들과 그 변형, 복제, 수집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인세인 박(Insane Park: 가명)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는 이번 개인전에서 현 세대가 겪고 있는 문화적 경험 이면에 숨겨진 본질적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그려내기 위해 두 개의 전혀 다른 전시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와 《그림을 그립시다》를 선보인다.
 
두 개의 전시 중 첫 번째 전시인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에서는 인터넷에 부유하는 밈(meme)과 짤들을 미술의 맥락으로 가지고 들어 온 영상 작품들이 설치된다. 짧게는 20여초로 만들어진 짤막한 영상들은 순간의 감정과 생각을 이모티콘이나 GIF의 움짤(움직이는 사진)으로 담아내는 현세대의 소통방식을 참조하고 있다. 인세인 박은 작업을 통해 밈이나 움짤이 맥락과는 관계 없이 무분별하게 복제되고 기하급수적으로 배포되며 사회적 경향으로 자리잡는 모습을 포착해낸다. 이러한 과정은 미디어를 통해 분출, 확산되는 개인의 욕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산업들과 이를 용인하는 사회 구조와의 대면으로 관객들을 인도한다.
 
개인전의 두 번째 파트인 《그림을 그립시다》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활동했던 미국 화가 밥 로스(Bob Ross)의 유명한 TV 프로그램 "그림을 그립시다 (Joy of Painting)"에 착안해 미술작품의 시장 가치 형성 과정을 희화화한다. 작가는 밥 로스의 수업 장면을 빌어 한국 추상 미술 작품을 쉽게 그려 작가가 되는 방법을 영상으로 만들어 보여준다. 밥 로스의 수업을 차용한 영상과 그의 수업을 모방하며 만들어진 작품들이 걸린 전시장에서는 미술 창작과 미술시장의 메커니즘이 밈의 언어를 통해 투사되고 있는 지점을 반추할 수 있다. 이는, 현대 미술 시장과 자본주의 체제 속 예술의 역할에 대해 던지는 인세인 박의 끈질긴 질문의 방식이기도 하다.
 
인세인 박은 이번 신작들을 위해 지나간 시대의 팝컬처(pop culture)와 넷상의 언어를 미술의 장치로 삼아 참조된 의미들을 전시장으로 불러낸다. GIF나 짤의 조각들로 흩어져 있는 이 의미의 조각들은 과거를 모방하고 복제함으로써 상황을 풍자하는 현세대의 납작한 표현방식과 중첩되어 우리 사회가 당면해 있는 모순과 문제를 직면하게 한다. 작가는 전시장 곳곳에 숨어있는 노래, 이미지, 문구를 좌표로 삼아 재미와 혐오, 염원과 욕망, 상품과 쓰레기, 예술과 밈이 공존하는 현실을 이야기 하며, 동시에 이를 순간적으로 소비해 버리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아라리오 갤러리 2020.6











2017 이면탐구자 전시서문

인세인 박 작가는 미디어 환경이 낳은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다루어왔다. 광케이블 외피를 그라인더로 긁어내 인물을 표현한 초기 평면 작업은 단번에 미술계의 주목을 끌었다. 케이블 피복의 원색을 배경으로, 긁힌 부분과 남은 부분이 만들어낸 명암이 섬뜩한 수배전단의 몽타주를 떠올리게 했다. 집집마다 촉수를 뻗어 무한대의 정보를 흘려보내는 광케이블은 미디어에 포획된 현실에 대한 영리하고 강력한 메타포였다. 네온사인으로 만든 텍스트 작업도 특기할 만하다. 세로로 세운 ‘미디어’ 문자열에서 ‘ㅣ’를 점멸시켜 ‘믿어’로 읽히게 하거나 ‘이즘 이즈 미스매치(Ism is missmatch)’, 즉 ‘이즘’과 ‘잊음’의 발음이 같다는 점을 활용한 언어유희는 디지털 시대 미디어의 부작용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과거 작업이 미디어가 이미지를 제공하는 방식, 대중 조작의 방식을 패러디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냈다면 최근 작업은 메시지를 덜어내거나 특정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미디어의 편집 방식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의 작업실을 빼곡히 메운 각종 목공, 용접 도구를 다루듯 디자인 툴과 동영상 프로그램 등 각종 편집 기술이 손에 붙어야 했다. 최근까지 뭉개짐(blur)이나 망점 확대(Pixelate) 같은 포토샵 기능을 이용해 이미지를 재구성한 작품 연작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작가는 창조자가 아닌 편집자”라고 언급한 바 있다. 현대적 삶을 관통해온 미디어와 광막한 가상의 네트워크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란 불가능하다. 어쩌면 이미지는 생성되는 게 아니라 소멸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원본 없는 사본이 부유하는 웹의 바다에서 작가는 컬렉터처럼 ‘짤방’에서 컬트영화의 스틸 컷까지 미디어가 제공하는 이미지를 채집하고 고고학자처럼 쌓인 먼지를 털어내 표본을 만든다. 또는 샘플링과 리믹스 따위를 구사하는 뮤지션을 떠올릴 수도 있다. 실제로 힙합 마니아이기도 한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기획, 연출 및 영상디자인을 망라한 1인 프로덕션 제작 방식을 실험한 뮤직 비디오 < 딸기가 좋아 >를 출품했다.    
 
이 왕성한 수집가가 최근 대두된 소셜 미디어 세계의 소란을 지나칠 리 없다. 지난해 5월 강남의 한 노래방 화장실에서 벌어진 ‘묻지마 살인사건’ 이후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여혐’ 대 ‘메갈’의 구도로 극한대립이 벌어지는 전장이 되었다. 영상 작업 < 페미니스트를 만드는 방법 >은 사회적 불협화음과 갈등이라는 소재를 다룰 때도 인세인 박 작가 특유의 가뜬한 재조합과 의도적 탈맥락화가 적용됨을 확인할 수 있는 작업이다. KKK 단복과 두건을 쓴 어설픈 신(작가가 분했다)이 ‘간단 레시피’로 페미니스트를 만든다는 난센스적 설정은 모든 극단주의에 대한 희화화임이 분명하다. 극우적 클리셰와 LGBTQ의 단편 이미지가 페이크 다큐 형식을 띤 조야한 영상에서 나란히 편집된다. 자극적인 폭로와 선동은 마땅한 분투를 대체하는 손쉬운 수단임을 역설로 보여주며 페미니스트 선언이 유행하는 현실을 꼬집는 듯하다. 결국 종교, 이즘, 미디어 권력 등에 대한 작가의 탈신화화 전략은 이 사안에서도 유효한 것이다. 


-강상훈 2017.12











2017 계단, 에스컬레이터 그리고 엘리베이터 김치신, 인세인박 2인전 전시서문

어떤 사건이나 현상이 벌어진 것은 하나의 사실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러 가지 층위를 가지고 있다. 마치 어딘가를 올라가려할 때 계단을 이용해 올라 갈수도, 혹은 엘레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갈 수도 있는 것처럼 각자의 상황에 따른 판단에 의해 움직인다. 이것은 상황에 의한 판단의 차이 또는 현상을 바라보는 태도의 차이일 뿐 '올라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처럼 하나의 현상이 일어나고 발생되는 상황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관점들, 태도들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최근 몇 년간 특히 많은 사건이 있었다. 넓게는 범세계적으로, 좁게는 한국이라는 비교적 작은 나라에서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사건들을 보도하는 뉴스와 수많은 정보들,
옳다고 주장되어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예상했던 많은 사건들로 비롯된 문제들이 반대의 것으로
보도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상황들까지 예상치 못한 전개로 흘러갔다. 과잉되어서 이제는 터져버릴 것 같은 정보들 안에서 정보의 진위(眞僞)는 중요하지 않아보였다. 둥둥 떠다니는 정보가 잉태한 이미지와 편협한 문장들은 이미 사건이라는 부모 밑을 떠난 지 오래된 자식이었다.

 인세인박은 미디어에서 나오는 이미지나 텍스트 등을 이용하여 수집하여 수집된 이미지를 작가만의 필터링을 통해 내뱉는 방식의 작업을 진행해왔다. 최근 몇 년간의 작업은 뉴스나 영화 장면의 캡쳐, 웹 사이트 등의 무작위적인 이미지를 편집하여 제작하거나 혹은 YouTube의 부분의 장면들을 짜깁기하여 재편집하는 방식의 영상을 발표해왔다.
 김치신은 소소한 개인의 이야기에서부터 국내외 사회문제들을 작업으로 다룬다. 충돌하는 이미지나 성질들에 따른 아이러니와 넌센스를 작업에 투영시켜 상징적인 사물이나 소재들에 리터칭을 가하고 변형시켜 제작한다. 그러한 결과물들을 통해 현재를 기록하며 재현한다.

그들이 걸어온 행보처럼 두 작가는 지향하는 지점이 유사하기도 하고 다르게도 보인다. 한 명의 작가는 외적인 부분들, 즉 주변의 이미지 자체의 구조적인 부분들을 편집이나 재구성이라는 변주를 통해 현상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의 작가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의 상태를 점검하고 직접 그 내용에 들어가 내용 안의 이미지를 직접 변형시키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작가들이 그러하듯 두 작가 또한 주변에 일어나는 모순된 현실을 느끼고 공감하며 그로 인한 각자의 방식으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인세인박 2017.11











2017 포르노 제작을 위한 습작 개인전 전시서문

인세인박은 지금까지 사용한 작품의 재료 면에서 그가 걸치고 있는 두 세대-컬러TV와 인터넷 세대-사이의 전형적 특성들을 내포하고 있다. 화단에서 주목 받기 시작했던 초기의 케이블 와이어 작품들에서는 깎아 낸 케이블의 규칙적 배열로 브라운관 TV에서 볼 수 있었던 주사선 효과를 표현하며 TV세대만의 감성을 드러냈다면, 이후 진행된 작품들에서는 TV세대와는 다른 자발적 정보수용이라는 인터넷 세대의 특징처럼 평소 좋아하던 컬트 영화나 블랙코미디 그리고 뉴스 등의 영상장면과 웹 상에서 수집한 이미지들을 해체, 변형 그리고 재조합하는 과정을 통해 자극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영상으로 연출한 점에서 두 세대의 특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미지 중심적 ‘도상적 전환 Iconic turn’으로의 패러다임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이후 등장하는 언어적 유희 작품들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세상을 떠도는 무수한 텍스트와 이미지들을 작가가 가지고 있는 괴이한 발상으로 반전시키고,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새로운 단어들의 조합으로 전화(轉化)시키면서 그의 작업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수포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특정한 사회관이나 철학 등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그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투영하며 단어나 이미지가 지니고 있는(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내용적 부분을 제거하거나 본래의 의미가 전도된 것들만 덩그러니 남겨 놓는다는 점이다. 익숙해져 더 이상 자극적이지 않은, 혹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그래서 더 이상 숙고하지 않았던 것들을 적나라하게 들춰내고 무책임하게 던져 놓는다. 잔인한 살인, 자살, 사냥, 핵 폭발 장면 등 온갖 잔혹한 장면들을 거리낌없이, 마치 철없는 미운 일곱 살 짜리 아이가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엉뚱한 질문처럼…
특히 이번 전시 『포르노 제작을 위한 습작 making film: porn』은 기존의 작업이 그러하듯,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는 ‘포르노’라는 장르를 스스럼없이 전시장으로 가져왔다. 포르노에 등장하는 장면들을 편집한 영상들과 직접 제작한 애니메이션이 전시장 벽면에 어지럽게 나뒹굴고, 프로덕션의 무비세트처럼 온갖 기구들이 설치물로 둔갑하여 환한 조명 아래 나타나 우리를 맞이한다. 이 광경과 맞닥뜨리는 순간 포르노를 처음 접하였을 때의 충격과 수치심에 휩싸인 어린 아이처럼 머리 속이 멍해진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찬찬히 전시된 각각의 요소들을 들여다보면 특이하게도 그가 진행해오던 작품들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이미지와 언어가 지닌 본래의 의미를 해체하고 삐딱한 시선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듯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 은밀한 사물들이 벽화나 다른 요소들과 매치되어 또 다른 의미로, 혹은 놀이 던져 놓으니 말이다. 이것이 그가 이야기하는 현대 매스미디어의 병폐에 대한 경고일까?
전시장을 나서면서 석연찮은 기분을 털어버릴 수 없는 건 움베르토 에코가 <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방법 >에서 사용하던 방식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세상의 부조리한 생활 습관들을 삐딱하게 바라보며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독자들을 한 순간 바보로 만들었듯 “왜 하필 ‘포르노’냐”라는 질문에 “재밌잖아요”라는 대답하는 인세인박이 우리의 말문을 막고 허세에 빠진 우리를 조롱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김동섭 2017.3











2017 포르노 제작을 위한 습작 개인전 전시서문

변화무쌍, 솔직, 담백, 예측불허‘미친(insane)’이미지 놀이
늦었다. 무려 30분 넘게 늦어버렸다. 불편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전시장에 내려갔을 때 작가는 무덤덤히 전시장에 앉아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전시를 둘러보는 동안에도 작가는 여전히 별말 없이 무덤덤하게 있었다. 작품으로만 봤을 때는 꽤나 깐깐할 것 같았는데, 은근 수더분해 보이는 인상이 약간 의외다.
그리고 다시 처음 만난 이 작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작업실이 있는 파주로 달려갔다. 그러나 어딘가 계속 어색어색한 분위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혼자 전시보고 파주로 갔어도 되는데, (그리고 그러겠다고 했던 것도 같은데) 이 작가 꽤나 의외다.
작업실에 올라가 작업을 둘러봤다. 나름 잘 정리된 작업실에서 컴퓨터로 작품을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조근조근 작품 설명을 이어나갔다. 첫인상에 약간 어눌할 듯 했는데, 수다스럽지 않게 작품설명도 잘한다. 정말 의외다.
인세인 박을 만났던 첫날의 기억이다. 인세인 박. 한글로만 봐서는 모르는 이름의 진면목. 미술계 아는 사람들은 다 알듯이 그의 작가명 인세인의 출처는 ‘insane(미친, 광기의)’이다. 그러니 좀 더 정직하게 표기한다면, 인쎄인 박이 더 맞을 듯도. 아무튼. 인세인 박의 이름이 ‘insane’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적잖이 거리감이 생겼었다. 아마도 적어도 이름에 이렇게 당당하게 ‘미친’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작가라면 보통은 아닐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깔끔하고 말끔하게 떨어지는 작업의 완성도는 거리감 못지않은 호기심도 유발시켰다.
인세인 박. 사실 그의 작업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과감한 태도변화였다. 한 때는 개념미술에 빠져있던 그가 ‘작가들이 과도하게 작품에 의미부여를 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 작업에서 의미를 버리는 연습을 했다고 했다. 그렇게 나온 작품들이 2014년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있었던 < 디렉터스 컷 >이었다. 3년 만에 열린 개인전에서 인세인 박은 인터넷, 뉴스, TV 등 다양한 미디어들에서 얻어낸  광고, 컬트영화, 포르노 영화 등에서 이미지들을 가공해서 선보였다.
사실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를 활용한 영상제작은 새로울 것도 흥미로울 것도 없다. 이미 1903년으로 에디슨 회사에서 일하던 에드윈 S. 포터는 영화저장소에서 자료를 찾다가 소방서에서 찍은 다양한 영상물들을 발견하고, 여기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입혀 첫 번째 파운드 푸티지 영화로 불리는 < 어느 미국인 소방수의 생애 A life of an American Fireman >를 제작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피에르 위그의 < 더빙 Dubbing >, 더글라스 고든의 < 트루 더 룩킹 글라스Through the looking glass >, 트리이시 모팻의 < 마더 Mother >, 아이작 줄리언의 < 텐 타우전드 웨이브 Ten thousand waves >등과 같이 많은 작가들이 파운드 푸티지를 이용한 다양한 작업들을 해왔다. 하지만 인세인 박의 작업에서 흥미롭게 읽히는 지점은 그가 파운드 푸티지를 사용함에 있어서 기존 작업들과의 차별점을 가지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파운드 푸티지의 경우, 서로 다른 이질적인 이미지를 중쳡시켜서 다층적인 의미를 제시하고자 한다. 본격적인 파운드 푸티지 필름의 원조라고 불리는 브루스 코너의 경우에도 영화나 뉴스, 광고에서 가져온 상관없는 이미지들을 편집하여 이미지를 파편화하고, 시각적으로 낯설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여기에서 아무리 이미지를 파편화한다고 하더라고, 최소한의 작가적 개입과 선택, 스토리라인을 잡아가는 방식은 여전히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여기에 비하면 인세인 박의 작업은 한결 가볍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핵이 떨어지는 이미지가 서서히 변해 어느 영화사를 로고로 잘 알려진 횟불을 든 여신의 모습으로 마무리 되는 < 뉴클리어 Nuclear >에 대한 작가의 인터뷰는 그가 작업에 임하는 태도에 대해서 잘 설명한다.
“하루 종일 북핵 뉴스를 들은 어느 날 밤에 영화를 보다가 이 제작사의 로고를 보니 핵폭발이 터지는 이미지와 겹쳐져 다가왔습니다. 무슨 정치적인 메시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복잡한 사안들이 우리에게는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남아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뒤섞이고 합쳐지는 거죠.”(인터뷰에서 발췌)
< 디렉터스 컷 >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에는 이러한 태도들이 잘 드러난다. 단순히 영상작업으로만이 아니라, 공간에 펼쳐지는 다양한 이미지들, 특히 편집방식에 대한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 가급적 작가의 의도를 배제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두드러졌다. 이미지를 확대하고, 프레임의 변화를 시도하고, 망점을 두드러지게 확대하고, 반투명 유리를 덧입히기도 했다. 기존의 파운드 푸티지 작품들이 여전히 비디오, 영상이라는 미디어적 속성 안에 머물러 있었다면, 인세인 박의 이 ‘미친’ 에너지는 비디오라는 틀에서 뛰쳐나와 사진으로 설치로 다양하게 변이된 모습으로 관객에게 다가왔다. 늘 그렇듯. 그의 작업은 하나로 쉽게 규정짓기 쉽지 않다.
인세인 박과의 작품에 대한 긴 이야기가 끝나고, 앞으로의 작업에 대해서 이야기가 오갔다. 의외로 그는 새로운 작업에 대한 이야기는‘포르노’라는 단어로 시작되었다. 이전 작업을 기반으로 유사한 영상/설치 작업을 예상했던 나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지난 전시에서 그렇게 작가를 지워내려고 했던 작가는 이제 아예 본격적으로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정작 그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해석할 준비가 덜 된 나에게 < 포르노 제작을 위한 습작 >(가제)라는 전시제목과 함께 작가노트가 도착했다. 그의 이야기는 ‘중학교 다닐 즈음에 처음으로 포르노 영화를 보았다’로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 그에게 그렇게 ‘성(性)스럽고 성(聖)스러웠던’ 포르노 영화 속 여자들이 이제는 더 이상 자극적이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 포르노 영화를 보았을 때의 느낌은 ‘살인사건을 보도하는 자극적인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제 그에게 포르노를 본다는 것은 인터넷을 보고 이미지를 수집하여 편집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언젠가 실현가능할지 못할지 모르는 포르노 영화를 찍기 위한 에스키스’라고하는 이 전시는 < 디렉터스 컷 >에서의 입장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그의 말처럼 오늘날 미디어를 통해서 쏟아지는 이미지의 과잉, 정보의 과잉은 사람들을 무디게 한다. 포르노 영화에 무덤덤해지는 것처럼, 우리는 미디어에서 이야기하는 그렇게 폭력적이고, 어이없는 이야기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그 뉴스들은 그저 소비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번 전시는 < 디렉터스 컷 >과 ‘미디어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같은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인세인 박이 ‘포르노’라는 소재를 좀 더 ‘과격하게’ 전면에 들고 나옴으로써 이번 전시와 < 디렉터스 컷 >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 같다. < 디렉터스 컷 >이 단순히 작가가 이미지를 어떻게 수집하고, 편집하여 가지고 노는지에 대한 부분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면, 이번 전시는 ‘포르노’가 분명 가시적으로 전면에 들어남으로써 새로운 레이어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전시에서 우리는 ‘포르노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작가노트와 전시자료를 훑어본 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이렇게 파격적(?)이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굳이 말 많은 ‘포르노 영화’를 들고 나오지 않았어도 충분히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마도 작업실에서 새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가 조금 유연하게 에두르는 작업으로 나올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이름처럼 그는 ‘미친 짓’을 감행했다. 작업은 예상보다 훨씬 직접적인 이미지들이 드러났다. 누군가에게는 전시장을 채운 이미지들에 둘러싸이는 것이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는 아직 충분히 불편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불편한 것들을 애써 외면하고 모른 척 하며 지냈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하게, 전시가 윤곽을 들어나면서부터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망막했다. 어쩌면 나는 그의 작업에 적절한 필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었고, 그의 작업과 정면승부를 해야 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이번에도 그는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예상할 수 있었다면 ‘인세인’인 아니었겠지. 그리고 예상할 수 있다면, 굳이 우리가 작품으로 세상을 바라 볼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잠시 잊고 있었다. 작가란 그런 존재라고. 작품이란 늘 이렇듯 우리의 뒤통수를 친다고.
이것이 아마 인세인 박의 이런 변화무쌍, 솔직, 담백, 예측 불허의 ‘미친’ 이미지 놀이를 지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신보슬 2017.3











2016 지나치게 감상적인 W/M 이지양, 인세인박 2인전 전시서문

지나치게 감상적인: W/M
이 전시는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파리, 텍사스’를 보고난 후 이지양과 인세인박이 주고받은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1984년도에 제작된 이 영화는 텍사스 파리의 모래사막을 배경으로 남자 주인공인 트래비스가 이별했던 그의 아내 제인과 가까스로 재회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4년 만에 만난 아내 제인은 핍쇼(peep show)에서 상대방이 보이지 않는 유리 칸막이 너머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여인이 되어있었다. 마침내 트래비스는 손님으로 가장해서 가로막힌 유리거울을 통해 제인을 만나게 되는데 이 장면은 이번 전시에서 두 작가가 보여주는 연결과 단절, 일방적인 응시의 시선 속의 미묘한 긴장과 유사하다.

이지양과 인세인박의 2인전 < 지나치게 감상적인: W/M >은 남녀 간의 관계, 소통, 사회적 긴장, 다름과 같음, 생물학적 차이 등의 이야기를 보편적이고 때론 개인적인 시선으로 해석한 전시다. 여기서 W/M은 일시적 혹은 순간적 감정의 변화를 뜻하는 단어 whim(① 변덕  ② 일시적 기분  ③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의 발음기호 [wɪm]인 동시에 woman과 man을 의미한다. (우연하게도 ‘파리, 텍사스’의 빔 벤더스(Wim Wenders) 감독 이름에도 ‘wim’이라는 단어가 쓰인다.)

먼저 이지양의 작업을 살펴보면, 그녀는 서로 다른 두 대상이 연결되었을 때 발생하는 변화에 관심을 갖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두 대상은 때로는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 물체이거나 무형적인 감정 사이의 긴장감이기도 하다. 그녀의 작업 < 볼룸 댄스 : 노드랜드에서 생긴 일 (Ballroom Dance : it happened in Nordland) >은 각기 별개였던 두 개의 풍선이 서로 연결되어 부유하는 움직임을 기록한 영상이다. 이 영상은 다른 두 개체가 일시적으로 결합됨으로써 만들어내는 상호적 에너지의 생성과 소멸을 보여준다. < 듣기에서 침묵으로(Listen to Silent) >는 어린 시절 종이컵에 실을 연결해서 서로의 목소리를 미미하게나마 전달하는 전화기를 만들었던 것을 연상시킨다. 플라스틱 컵과 고무호스로 만들어진 전화기 사이에는 무거운 천이 가로막고 있어서 이 전화기는 하나이면서 분리된 두 개의 다른 개체이고, 불완전한 소리를 통해서만 연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로 관계를 구획한다. 2채널 영상 < untitled(pipes) >는 두 남녀가 브라운관을 경계로 하나의 공을 파이프로 불어 넘기는 모습이 담겨있는데, 불안정하게 흔들거리는 공의 움직임은 이지양의 작업에서 견지하고 있는 두 타자가 만나서 생성되는 관계성을 떠올리게 한다.

인세인박은 주로 미디어를 통해 수집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차용하거나 변용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가 tv나 인터넷에서 수집한 대중적인 이미지들은 다양한 매체로 출력되고 설치되었는데, 이러한 것들은 네온사인 이미지나 광고판처럼 산업사회의 일상에서부터 부유하는 것들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한 남녀 간의 관계를 주제로 제작한 작업을 선보이고 있는데, 영상작업 < 청춘 >은 남녀가 서로의 침을 각자의 입에 뱉어내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점차 끈적이고 질척한 침이 전달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작업은 남녀 간의 연애가 지속되는 시간의 감정들을 비유하기도 하고, 타액의 교환이 만들어내는 합일된 물질이 공허한 생리적 활동의 반복으로 보이기도 한다. 두 남녀는 서로 다른 개별적 행위자로서 자기 욕망의 타액을 상대의 몸에 배출하고 그 배출물을 수용하고 있는데, 이 행위는 매우 친밀해보이지만, 생물학적 유기체의 기계적인 활동처럼 공허하다. < FEMINIST >는 네온으로 만들어진 알파벳 ‘FEMINIST’ 사이로 오줌이 순환하는 도발적인 설치 작품으로, 여성으로서의 권리를 표방하면서도 남성의존적인 일부 여성에 대해 비판적 시선으로 미러링한 작업이다. 페미니스트로 지시되는 여성 주체의 언어는 네온을 따라 흐르는 헬륨가스 대신 인세인박의 소변으로 대체되어 흐르고 있다. 아이러니해 보이는 이 상황은 남성과 여성의 성정체성의 모호성과 이원적 분절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녀의 성차에서 오는 대립상태는 커튼 사이로 들려오는 상대의 목소리처럼 불분명하고 잘 들리지 않는다.

-류혜민 2016.10












2014 Director's cut Solo exhibition text

The Subject in the Image Runs Away without an End
Today’s photography, which is completed through the process of magical editing after its subjects are captured by the lens of the camera, has been evolving in different ways within the absolute order of the subject being in front of the lens of the camera. A simple belief in the subject in front of the camera, or, in the object that exists in front of the lens, has been considered as a natural condition for the scenes captured by photography to be valued or thought of as the origin of artistic sensations. This looks similar to the phenomenon that documentary films are evaluated with different standards from commercial films under the pretext that they are based on real incidents and edited upon directors’ intention. Artists that are influenced by popular culture and especially by cinematic images, such as Lewis Baltz, raised questions on the limitation of photography as a record. They reflected on the ways to present photographic compositions or blank spaces, and printed images, moving beyond the thoughts on subjects in front of the lens. The diverse questions and thoughts on the photographic forms give rise to new approaches towards images, subjects, and the medium, often creating irregular openings in what is considered as a standard. The current exhibition, Director’s Cut, can be read from this perspective.

First, what deserve the most attention in the current exhibition are the subjects captured by the artist’s camera. The term subject, which is written in Korean as pi-sa-che (‘피사체(被寫體)’ 1)), literally means ‘the object that is depicted or copied.’ This simple dictionary definition of the term indeed has many weak points in describing what has functioned as subjects in the new works by the artist. Further, it is inadequate to specify the countless images produced through media in contemporary art and the subjects that became the models within such a diversity of expressive methods. It might be appropriate to see that Insane Park’s work departs from the conflict with such a limited definition of the subject in photography. This is because the objects that the lens of the artist’s camera is directed towards in Director’s Cut are not the subjects laden with general characteristics but the ones that are shattered while carrying immeasurable emptiness.

In the current exhibition, all the works installed in the exhibition space are photographs of images that the artist photographed after collecting them by himself from various media. In other words, the subjects put in front of the camera are not certain existing substance or models but the images in the monitor of Insane Park’s computer. The artist displayed images he collected on a monitor then put lightings on it. And he photographed the images that are distorted by the real light source. In their printed outcomes, the images captured in such a way do not merely function as original subjects of a certain moment. The image in front of the lens is an image as an outcome of capturing a real object from one moment of time in the past, which is a record that is continuously regressing from the viewpoint of the present. Insane Park constructs a stage with the conflict or conversation between different kinds of lights that are all non-materials intervening the process, the irrelevant gap and aperture that appear within such communication. The camera of Insane Park is clearly directed towards the place of its subjects. However, there is a wide gap between the image that intervenes in the place of a camera and the subject of the camera, and between the image and the reality. As we trace the origin of the subject, it runs away without an end.

Another interesting point shown in the current exhibition is that the artist is moving forward from his previous method of collecting images and playfully patching them to diverse practices of thinking different ways of presenting images. Until recently, Insane Park has been experimenting with the relationship among image, space, and light by depicting space and images as a place in a new dimension by the intervention of light, which was done in the form of subjunctive conversations.
For instance, he installed two identical images with one of the images became vague and blurred through a Photoshop effect while another image is layered with a misty glass. He also displayed an image with a strong highlight at the center, installed with a real fluorescent lighting.

The current exhibition Director’s Cut is a result of an imageplay where the role of the artist as an editor is emphasized. It is a space for investigating a method that goes beyond the rationality, standard, and authority established between photography and its subjects. The works proposed by Insane Park witness the destruction of the old rationality in the laboratory of an editor and testify the production of images towards another dimension. The constantly regressing subjects in the artist’s photographic images possess temporality that cannot be assumed by a single image produced by a medium that is consumed and extinguished. At the same time, the flat images that intervene in a space through material or nonmaterial objects become relativized.

Through his experiment based on different assumptions, Insane Park is aesthetically stimulating certain authority that has been possessed by photography. From that point, there is significance in the relationship among the subjects that have temporality, relativized images, objects that intervene in the situation, and the space that surrounds them. Moreover, the artist’s reflection on the emptiness between images and editing and between images and reality is evolving through constant movements that appropriate images in different ways such as collecting and images through popular culture, patching of the collected images, mix of images with objects, relativization of images, and so on. In this way, Insane Park’s imagination and a playful game to tell what has been unsaid about images escapes from what is considered as a standard, creating fissures and infinitely running away and moving towards the very gap.

1) In the North Korean dictionary, the term is defined as an object that receives light. In the context of Insane Park’s work, it would be more appropriate to regard the term as ‘an object that receives light’ than ‘an object copied through a camera

-Soyoung Hyun 2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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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Director's Cut 개인전 전시 서문

이미지 속 피사체는 계속 달아난다
카메라 렌즈로 피사체를 포착, 그 순간을 기록한 후 마법 같은 편집 단계를 거쳐 완성되는 요즘의 사진은 렌즈 앞의 피사체가 존재한다는 절대적인 질서 안에서 다양하게 변화해 왔다. 카메라 앞에 피사체, 즉 렌즈 앞 실존하는 대상에 관한 단순한 차원의 믿음은 사진이 담고 있는 장면이 가치를 발휘하기 위한 당연한 조건 혹은 예술적 감흥의 기원처럼 여겨졌다. 이는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감독의 의도에 따라 편집되었다는 전제하에 상업 영화와는 다른 기준으로 평가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한편으로 대중매체, 특히 영화 이미지에 영향을 받은 Lewis Baltz 같은 작가들은 기록으로서의 사진의 한계에 대해 질문하며 렌즈 앞 피사체에 관한 고민을 넘어 구도 혹은 여백, 출력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방식을 고민하기도 했다. 이렇게 사진에 관한 다양한 형식적 질문과 사유는 이미지와 피사체, 그리고 매체에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며 표준적인 것에 대해 균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인세인 박의 이번 전시 < Director’s cut >은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이번 전시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작가의 카메라가 담고 있는 피사체이다. 사진에서 주로 사용되는 단어인 ‘피사체(被寫體)’는 한자 그대로 ‘묘사되는, 혹은 베껴지는 물질’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간단한 사전적 정의는 사실 인세인 박의 신작에서 피사체로 기능한 것들을 설명하기에 부족한 지점들이 많다. 나아가 동시대 미술에서 미디어를 통해 생산되는 수많은 이미지와 그 다양한 표현방식 안에서 모델이 된 대상을 지칭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인세인 박의 작업은 이런 피사체의 한계적 정의와의 불화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전시 < Director's cut >에서 작가의 카메라 렌즈가 향하고 있는 대상이 일반적 성격의 피사체가 아닌, 수많은 공허를 담은 넝마로서의 피사체이기 때문이다.
전시공간에 설치된 모든 작품은 작가가 직접 다양한 매체로부터 수집한 이미지를 카메라로 재촬영한 사진이다. 즉 카메라 앞의 피사체는 그 어떤 실존하는 물질, 모델이 아닌 인세인 박의 컴퓨터 모니터 속 이미지인 것이다. 작가는 수집한 이미지를 모니터에 띄우고, 이것에 조명을 비췄다. 그리고 실제 빛에 의해 변형된 모니터 속 이미지를 카메라로 촬영했다. 이렇게 촬영한 이미지는 출력된 결과물 속에서 단순히 한 시점의 기원적 피사체로 기능하지 않는다. 카메라 렌즈 앞 이미지는 과거의 한 시점에서 실제 대상을 담은 결과물로서의 이미지로, 현재를 기준으로 계속 후퇴하고 있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에 개입되는 비물질인 빛이 나누는 불화 혹은 대화, 그 사이에 드러나는 엉뚱한 틈, 간극을 무대화하고 있다. 인세인 박의 카메라가 향하는 방향은 분명 피사체의 자리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카메라와 피사체의 자리에 개입된 이미지, 그리고 그 이미지와 실제 사이의 공백은 아주 멀다. 그 기원을 쫓으면 쫓을수록 피사체는 계속 달아난다.

 이번 전시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이미지를 수집하고 유희적으로 짜깁기하며 작업해왔던 기존 방식에서 더 나아가 이미지를 연출하는 방법에 관한 고민을 다양하게 실천했다는 데에 있다. 인세인 박은 최근까지 공간과 이미지가 빛의 개입에 의해 새로운 차원의 공간으로 묘사되는 식으로 이미지와 공간, 빛의 관계를 가정법적 대화의 형식을 통해 실험해왔다. 본 전시에서 작가는 더 나아가 가상과 실재를 대변하는 이미지와 오브제를 전시공간에 과감히 혼합하여 배치함으로써 새로운 형식을 제안하고 있다. 이를테면 두 개의 같은 이미지 중 한 이미지에는 포토샵으로 희미한 효과를 주고, 나머지 이미지에는 실제 물체를 뿌옇게 보이게 만드는 유리를 덧씌워 나란히 설치하거나 한가운데에 강한 빛을 지닌 이미지에 실제 형광등을 설치하는 방식 등이 그렇다.
 전시 < Director’s cut >은 편집자로서의 작가의 역할이 강조된 이미지 유희의 결과물로, 사진과 피사체가 맺어온 합리와 표준, 권력을 넘어서는 방식을 탐구하기 위한 공간이다. 인세인 박이 제안하는 작품들은 편집자의 실험실 속에서 묵은 합리의 파괴와 또 다른 차원으로의 이미지 생산에 관해 증언하고 있다. 그가 촬영한 사진 속의 끊임없이 후퇴하고 있는 피사체는 소비되고 사라지는 미디어의 한 이미지로는 상정할 수 없는 시간성을 가진다. 그리고 동시에 물질 혹은 비물질적 오브제를 통해 공간에 개입하는 평면이미지는 상대화된다.
시간성을 지닌 피사체와 상대화된 이미지, 개입된 오브제,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공간의 관계는 작가가 여러 가정을 바탕으로 한 실험을 통해 사진이 점해오던 모종의 권력에 미적 자극을 가하고 있다는 데에서 의의를 지닌다. 또한, 이미지와 편집,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공허에 관한 작가의 고민은 다양한 대중매체를 통한 이미지 수집, 짜깁기, 오브제와의 혼합, 상대화와 같은 이미지를 이용한 끊임없는 유희적 움직임을 통해 진화하고 있다. 사진 혹은 이미지에 대해 여태껏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기 위한 작가의 상상과 놀이는 이처럼 표준에서 달아나 균열을 만들고 그 틈으로 무한히 달아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정의하는 피사체와 달리 북한어로 피사체(被射體)는 빛을 비추는 대상이 되는 물체를 일컫는데 오히려 인세인 박 작업의 맥락에서는 ‘카메라로 베끼는 대상’으로의 피사체보다 ‘빛을 비추는 대상’으로의 피사체로 부르는 것이 맞다.

-현소영 2014.7











2014  MONOGRAM 오택관 , 인세인박 2인전 전시서문

미디어 위의 유희적 운동: 즉흥적 표류, 수집 그리고 짜깁기

이미지와 미디어의 지배로부터 독립하여 오로지 스스로의 사유와 주체성만으로 삶을 영위하는 개인은 더는 현실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시선을 이끌고는 금세 자취를 감춰버리는 수많은 이미지는 아주 빠른 속도로 실재를 어지럽히며 현실을 더 공허하게 할 뿐이다. 벤야민은 “곧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대상이 이미지가 된다”고 말했지만 끔찍한 것은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나타났다 사라진 이미지 스펙터클들이 실제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미지의 유령은 시대착오적 동시대성, 현실 감각의 부재 등을 초래하며 모종의 착란을 일으킨다.
이미지의 수용과 재 이미지화를 통해 많은 것들의 본질과 실재는 망막 위에서 이미지와 뒤섞인다. 게다가 현상을 수용하는 주체의 감각조차도 진화된 미디어를 통해 이미지로 변한다. 이미지는 사라졌지만 실로 사라진 것이 아니며 그와 함께 본질은 가벼워지고 실재는 공허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본질을 알 수 없는 이미지 속에서 시선을 통해 ‘의미’를 찾는 태도는 오히려 작위적일 수 있다. 이미지는 인간의 손이 개입됨과 동시에 복제, 재생산의 과정을 거치며 자본주의적 상황에서 영향력을 얻었지만, 역사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로서의 효력은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는 오히려 유희의 가능성만 지니고 있을 뿐이다.
 오택관은 'Grapictures' 시리즈의 연장선에서 신작과 기존 작업을 선보인다. 공간의 특수한 성격을 작품의 배치와 확장에 반영하기도 하는 작가는 그래픽적으로 자유롭게 편집이 가능한 텍스트, 기하학적인 도형, 색, 레이어 등을 2차원의 캔버스 공간에서 회화로 묘사했다. 작가는 미디어 위에 존재하는 주체적 표류자로서 자유로운 움직임으로의 붓질을 통해 이미지를 위한 유희를 즐긴다. 유희의 목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 관한 단상을 주관적으로 그리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미지와 추상적 공간의 생산에 몰두하는 즉흥적 움직임, 그 자체이기도 하다. 디지털 이미지로의 편집으로 보일법한 기하학적 도형과 입체, 공간들은 작가를 통해 캔버스 위에서 전통 회화의 기법과 함께 집합적 공간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인세인 박은 대중매체를 통해 노출되는 다양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재료로 이용해왔다. 작가는 이미지를 수집하고 미디어 위에 이들을 복제, 분산시키며 유희적으로 짜깁기함으로써 이미지에 의한 이미지를 제작한다. 이번 전시에서 공개되는 신작들도 일련의 수집과 짜깁기를 통한 놀이의 결과물이다. 인터넷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이미지들은 그의 작품에서 텍스트를 통해 모종의 의미를 부여받는 듯 보이지만, 이 지점에서 작가는 의미 ‘생산’과 대조를 이루는 의미의 ‘상실’을 지향한다. 텍스트와 이미지를 짜깁기한 장면의 넝마들은 곧 공허로 향해있는 것이다. 신작 < 성공을 위한 세 가지 것들 >은 '성공(success)'이라는 단어를 ‘suck' 'sex' '$' 를 짜깁기하여 ‘suck$ex'라는 새로운 텍스트로 조합한 네온 설치 작업이다. 많은 이들이 지향하는 ‘success’라는 단어는 관계가 모호한 이질적 텍스트들로 분산되고, 작가에 의해 재조합된 사이비 단어 'suck$ex'는 그 본래의 의미에 미심쩍은 틈을 남긴다. 이것은 마치 이미지가 실재에 개입하는 과정과도 유사하다.
 오택관, 인세인 박의 2인전 < 모노그램 Monogram >은 이미지에 의한, 이미지를 위한 유희로써 미디어 위에서 벌이는 즉흥적 표류, 수집된 이미지에 의한 짜깁기와 같은 움직임 자체의 본질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제안으로 해석할 수 있다. 상이한 듯 보이나 결국 ‘이미지’라는 같은 지점을 공유하는 두 작가 작품의 집합적 배치는 미디어와 이미지의 허구를 드러내고 이들의 맹목적인 부유를 경계한다. 이미지로 의미를 생산하는 것이 더는 효력이 없다면 이것과 관계한 유희적 움직임이 보이는 것들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유효할지도 모른다. 미디어 위의 움직임 그 자체의 유희는 관객들에게 이미지를 바라보는 방식을 넘어 보이지 않는 실재를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비판적 사유를 이끈다. 


-현소영 2014.4











2013 생생화화 전시 서문

인세니티의 역설, 인세인 박의 예술세계
인세인 박(Insane Park)이라는 명칭부터 흥미로운 젊은 작가는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미래를 이미 예명에 상징화하면서 내면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인세인 박이 주목을 받은 것은 2011년 ‘M.IDEA’라는 메가급 전시를 본격적으로 보여주고 나서부터인데, 제목에서 시사하듯 특이한 매체가 화면을 가득 메운 평면 작품이 예사롭지 않았고, 우리를 둘러싼 정치, 경제적 상황을 설치작품으로 체현하고 있었다. 작가가 말하는 미디어는 이데아 자체일 것이다. 아니면 미디어를 통해 바라보는 미디어 현상학 자체가 동시대 예술이 가야 할 유일한 길이라고 강력하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2012년 영은미술관의 전시 ‘블레임 게임(Blame Game)’에서는 전시 구성 방식이 더욱 대담해져서 한국 자본주의가 갖는 독특한 색채와 감각을 네온 설치작업으로 구현해냈다. 젊은 작가의 초기 전시회는 앞으로 우리 미술의 방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에 어째서 작가의 관심이 한국 사회의 번잡함에 쏠려있는지 궁금함을 자아냈다.
미디어 현상학의 개척자로 잘 알려진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는 ‘코무니콜로기’라는 자신의 이론을 세상에 선보이면서 인류사의 코드를 분석한다. 그는 인류의 첫 번째 삶과 역사는 가상과 실재가 구분되지 않았던 시대로서 심미적 느낌 그 자체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시기라고 한다. 따라서 공감각적이며 4차원적으로 세계를 인식했다고 정의한다. 언어 없이 춤과 제스처로 세상과 교류하던 시기였으며 이를 매개로 세계를 설명하고 이해하던 방식이었을 것이다. 빌렘 플루서에 따르면 두 번째 인류 역사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처럼 3차원적으로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인류는 공감각적 느낌의 삶에서 세계를 주술적 방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제 여기서 더 나아가 인류는 2차원적인 회화 방식으로 고도화된다. 라스코 동굴의 벽화는 주술성이 고도로 첨예화됨을 보여주는 예시일 것이다. 세계를 보는 방식이 고도화됨에 따라 상기의 비너스처럼 막연한 출산이나 건강의 바램과 기원과 같은 소극적 주술에서 수렵과 같은 경제적 성과를 위한 직접적 훈련을 쌓는 적극적 주술 방식으로 발전한다. 이제 인류는 1차원적인 문자를 개발하기에 이른다. 문자가 개발되면 개념이 생긴다. 개념이 생기면 앞서 말했던 주술적 순수의 시대에서 개념이 지배하는 추상적 이성이 생긴다. 뮈토스에서 로고스로 인류의 발전 방향은 진화한다. 우리가 잘 아는 인간의 역사는 대부분 여기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0과 1이라는 이진법의 세계로 문자는 녹아 급기야 해체하게 된다. 즉 문자라는 텍스트의 세계가 점으로 분해되어 0차원적인 컴퓨터, 사진 등 디지털 시대로 이행한다고 빌렘은 말한다. 더 이상 인간은 주술이나 신화, 문자가 주는 개념적 이성과 추상화로 세계를 사유하려 들지 않는다. 미디어가 던져주는 또 다른 공감각에 이성이 마비된다. 그리고 심미적 느낌 그 자체를 실존의 근거로 삼아버린다. 미디어라는 신화, 즉 진화된 뮈토스가 로고스를 퇴행시키는 시대가 된 것이다.
우리는 접두어 ‘후기(post)’를 달고 살고 있다. 그것이 포스트모던이건 탈역사(post-historical)이건, 후기 자본주의건 그렇다. 후기의 특성은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있고 진리가 무엇이며 왜 그런 것들을 알아야 하는지 설명하려 들지 않는 사태에 있을 것이다. 사회와 세계를 이끌어 가는 방식이 더 이상 진정성이 아니라 느낌과 감각에 의해 이루어지는 시대에 후기라는 접두어가 들어설 자리가 있다.
이렇듯 인세인 박이 자신의 예명을 광기를 뜻하는 ‘인세니티(insanity)’에서 따온 것은 이 불확실성과 광기와 판단 불가능의 시대로 자신을 적극적으로 위치 지으려는 의도로 파악할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의 감수성이 로고스에 우위를 보이기 시작한 시대이며, 0차원의 추상성이 1차원의 언어 개념을 넘어선 시기이다. 더구나 우리가 장구한 시절 쌓아왔던 독특한 4차원(애니미즘), 3차원(목조 건축과 생활구조), 2차원(한국 회화), 1차원(세계에 대한 관점)의 이해방식을 송두리째 폐기하고 서구적 4차원(기독교), 3차원(그리스 조각, 모더니즘 건축), 2차원(원근법, 추상미술), 1차원(자본주의적 세계관)으로 급격한 순회방식을 취하다가 그나마 계몽의 로고스마저 상실된 이상한 뮈토스의 0차원이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인 것이다. 디지털 모바일, 인터넷, 유튜브, 텔레비전의 현란한 유동성의 핸들과 자본주의라는 이상한 욕망의 추동력이 모든 인간과 사회를 통제하고 이끌고 있다. 이래서는 누군가 자신이 정상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오히려 타인으로부터 비정상으로 비춰지는 상황과 세태이며, 광기가 오히려 정상처럼 보이는 상황이다. 예술이 인간 외부세계를 이해하는 이성과 마땅히 추구해야 할 인간 내부세계인 윤리 규율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메우는 유일한 브릿지라고 인정할 때, 흐트러진 이성과 불신임을 받는 윤리, 이 양자를 적절히 조율해야 하는 역할은 예술이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인세인 박이라는 작가가 지향하는 동시대의 작가적 책무란 이것이 아닐까 싶다.
두 번째 개인전에서 전선 코일(케이블)이 물감을 대체해서 너와 나를 비롯한 우리의 디지털 일상이미지를 재현시킨 까닭은 후기라는 접두어의 시대에서 뮈토스의 감정이 로고스를 압도하는 시대상을 스스로의 존재미학으로 정확히 풀고자 했기 때문이다. 존재미학이란 예술가로서 스스로 설정한 강한 ‘공약의 짐(burden of commitment)’에 다름 아니다. 이 공약의 무거운 짐은 세 번째 전시회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표명화된다. 이 전시회에서 작가는 온갖 자본주의의 상징물, 비정상적으로 발전한 우리의 종교적 감정, 즉 세속화된 숭고, 이를 타파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것들이 우리를 진정으로 피로하게 만든다는 것 하나만은 알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우리의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아서 전혀 간파할 수 없었던 현상들이, 그리고 보고 싶지 않았던 현상들이 작가의 의도와 작가가 선택하여 극화된 물질에 의해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이런 점이 인세인 박의 미래에 기대감이 높아지는 이유이다.
끝으로 작가의 진보적 세계관을 가장 극명히 느낄 수 있는 작품 시리즈가 있다. 2013년도에 제작된 실크스크린 연작 ‘가족의 탄생’이 그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이들, 침팬지 4명이 주인공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면, 다시 말해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림은 ‘정상(normal)’이 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면 ‘호모섹슈얼(homosexual)’이 된다. 침팬지와 어머니가 만나면 ‘수간(sodomy)’이 될 것이다. 넷 모두가 모이면 ‘하드코어(hardcore)’라는 것이다. 이러한 미학적 전략을 ‘소격효과(verfremdungseffect)’ 혹은 ‘낯설게 하기’라고 말한다. 우리가 작가의 호모섹슈얼, 하드코어, 수간의 장면을 접하면 불편하고 불쾌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불편한 이유는 우리의 이데올로기가 ‘정상’ 이외는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우리로 하여금 불쾌감을 의도적으로 일으키기 위해서 이러한 그림을 제작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시리즈를 선보임으로 우리의 이데올로기의 정체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작가의 작품을 접하는 순간 우리 내면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보수화된 가치, 경직된 사고, 배타성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작가야말로 우리의 내면의 불편한 이데올로기를 오히려 유쾌한 농담으로 파악하는 수사학자라고 생각한다.

-이진명 2013.12












2012 Blame Game 개인전 전시 리뷰
텍스트에서 출구찾기
어린 시절 큰어머니는 늘 나를 데리고 주일의 종교집회에 참석하셨다. 이른바 전도를 하셨던 것이다. 큰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책자를 열심히 읽었다. 무신론자인 우리 집은 늘 타박의 대상이었고 사탄의 무리이기도 했다. 그 종교적 차별이 어린 내겐 너무 큰 상처였다. 특정 종교를 믿느냐 아니냐에 따른 그 차별과 편견이 못내 원망스럽고 두려웠던 것이다. 그 이후 나는 내내 종교와 무관한 삶을 살아왔다.
며칠 전에 영은 미술관에서 인세인 박의 전시를 보았다. 문자가 주를 이루는 텍스트 작업이었다.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소망이니라”라는 문구가 프린트되어 걸려 있다. ‘사랑’이 ‘소망’으로 바뀌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는 순간 소망교회와 그 출신의 권력자들이 어른거렸다. 그런가하면 ‘주 예수’를 ‘(주)예수’로 치환한 작업에서는 오늘날 기업화·상업화된 대형교회의 거대한 건물이 떠올랐다.
하나님이 없는 사회는 지상의 지옥이 될 거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입에 담고 사는 기독교인들의 수가 엄청나고 밤이 되면 온 도시가 공동묘지로 돌변하는, 붉은 십자가로 가득하며 장로가 대통령인 대한민국은 과연 평화롭고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정의로운 사회인가? 필 주커만은 < 신 없는 사회 >라는 책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강렬한 종교적 감정이 널리 퍼진 나라라고 해서 반드시 사회적 건강이 확보되지는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종교가 건강하고, 평화롭고, 부유하고, 속속들이 선한 사회의 필수적 요소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종교보다는 오히려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세속주의가 도덕적이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어준다고 말한다.
인세인 박은 특정 종교를 폄하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주어진 사회시스템이 강제하는 온갖 권력적인 텍스트의 체계, 말씀의 성찬들이 어떻게 사람들의 의식과 마음을 왜곡시키고 있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그는 텍스트의 행간에 개입해 우연적인 것처럼 문자를 슬쩍 지우거나 흔든다. 그런 유희의 결과 세로로 쓴 ‘조중동’은 ‘좆도’가 되는 식이다. 이 세계는 온갖 텍스트와 이미지로 가득하고 우리는 그로부터 한 발짝도 자유롭지 못하다. 인세인 박은 그 ‘text’에서 ‘exit’를 부단히 찾아내려 한다.

-박영택 2012.5












2012 Blame Game 개인전 전시 서문

인세인 박의 2012년 < Blame Game > 전시는 기존의 체제에 대한 비꼬기라는 작가적 시선을 담고 있다. 작가는 미디어를 통해서 한번쯤 보았을 법한, 혹은 주변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미지의 변환, 전복을 통해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러한 텍스트의 뒤흔들기, 시각적 이미지의 비틀기 작업은 작가 자신을 비롯하여 관람객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 Gold >, < 주예수 >, < Neon >과 같은 작품은 한국사회에서 기독교가 보여주는 특수한 종교적 상황에 대한 조롱과 비판이 담긴 내용이다. 

작가는 어릴 적부터의 경험과 그에 대한 비판을 단순히 시각적 이미지 뿐만 아니라 텍스트와 소리를 통해 종합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Family Mart >, < 국민은행 >과 같은 작업은 뉴스, 미디어에서뿐만 아니라 생활주변에서 등장하는 익숙한 이미지들을 차용하여 그 이미지를 재조합하여 작가만의 문맥으로 만들어내는, 차용과 콜라쥬 방식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와 텍스트를 조합하여 비트는 작업은 인세인 박의 중요한 작품 경향 중 하나이다. 그동안 가장 잘 알려진 케이블 회화작업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보여진다. 규칙적으로 배열된 케이블선의 질감으로 이루어낸 화면은 독특한 재료의 선택과 제작기법의 조화로 인해 주목받았다. < Image-Unknown >라고 명명된 시리즈 작업은 주로 사람의 얼굴이 등장하는데 이는 범죄자 몽타쥬, 미아찾기 전단지의 인물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다. 작가주변 사람들의 실제 이미지를 조작하여 영상이미지, 가상의 이미지로 만들어냄으로써 작가는 텔레비전과 미디어에서 나타나는 현실과 비현실의 혼재된 구조, 이미지의 일방적인 전달체계, 대중을 향한 강제적인 힘에 관하여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미디어가 발산하고 있는 수많은 이미지와 그로 인한 영향력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히 케이블 작업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작가는 이러한 이미지의 비틀기 작업을 다른 설치작업에서도 적용시키고 발전시켜왔다.
2011년 아라리오 갤러리 전시에 출품했던 <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 < M.idea >와 같은 작업은 TV, 네온과 같은 이미지의 발산 매개체를 본격적으로 드러낸 작업이다. 작가는 미디어와 사회의 매커니즘이 드러내는 부조리를 포착하고 그것을 조합하고 있다.
인세인 박은 현실의 허위적 문제점과 부조리를 발견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나타냄에 있어 상황의 정황적 문제를 지극히 체계적이거나 무겁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사회에 대한 의심, 불신, 모순적인 시선과 읊조림은 짧고 빠르며 마치 무심코 지나가듯이 작품 속에 담겨져 있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사회나 그가 바라보는 대상에 대하여 지나치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실재적인 것을 다른 방식으로 환기시키는데 있어 기호들과 이미지들의 층들이 서로 혼재되고 충돌하는 방식을 통해 낯설게 만들고 있다.
비판적 미술에서 가장 대표적인 시각적 전략은 새로운 경제, 사회 속에서의 기표에 대한 물신숭배를 징후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점이다. 현대적 냉소주의는 이데올로기 비판이 포함되어 있으며 익명성을 근본으로 하는 반사회적 일탈행위이다. 풍자적 즉물작업과 전략적 이미지의 전도는 자칫 계몽적인 허위의식과 이데올로기적 비판성을 지니면서 냉소적 이성의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 냉소적 이성은 사회적 한계와 실존적 한계라는 문제를 동반하는 자기보존의 욕구를 지닌다. 그러므로 냉소주의는 작가가 사적인 상태로 살아가면서 주변과 세계의 상황을 내면으로 흡수하므로 사회적 자기경험과 관계있다. 사회적, 개인적 자기 보존의 문제는 자기 파괴의 문제와 도덕의 논리가 전혀 통하지 않는 자기 부인의 논리를 지니고 있다.
인세인 박의 최근까지 작업이 주로 기호와 이미지를 노출시키는 일차적인 단계였다면 점차 대상의 의미를 와해시키는 상태로서 혐오스럽게 만들고 있다. 작가에게 있어 아직 사회적 문제의식과 작가적 시선을 조합하여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초기단계이므로 아직 전복의 도전적인 태도가 확실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또한 작품 속에 담긴 내용의 층들이 다양하거나 심오한 깊이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상징적 질서를 조롱하기 위하여 소외와 물화의 암호로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은 자기의식적, 자기풍자적 제스처를 작가가 인지하고 있으므로 앞으로의 작업을 기대하게끔 한다.

-류지연 2012.4












2011 M.Idea 개인전 전시 리뷰

미디어의 확산을 대면하는 인식의 그림자
늦은 밤 조명 없는 실내공간에서 푸른빛을 내뿜는 텔레비전, 노이즈 가즉한 화면에서 발산되는 그 몽환적인 색감은 시종일관 컬트적인 분위기로 점철된 데이빗 린치영화의 느낌을 연상시킨다. 그 싸이키델릭한 공간감에 텔레비전이 전달하는 인물이 중첩되는 상황이라면, 재현된 대상에 대한 균형 잡힌 판단을 기대하기는 어렵게 된다.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은 그 분위기에 함몰되면서 어느새 자극을 선호하는 매스미디어에서 수시로 뿜어내는 범죄자의 얼굴과 같이 익숙해진 대상으로 연결하는 인식의 통로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 익숙한 인식의 과정에 등장할 법한 인물상의 시각적 분위기를 재현시킨 작품을 발표하며, 인세인 박은 선명한 정체성을 보여주었다. 이미지를 전파하는 미디어의 활동과 그것을 수용하는 우리의 신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능숙한 상호작용에 익숙해져 있다. 신체는 미디어에 의해 전달된 이미지의 수용체로서 진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이미지에 영향력을 미친 신체의 감각기관은 매체의 진화에 영향을 미지고 변모되는 매체의 속성은 다시 수용체의 감각기관의 변이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상관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인세인 박은 디지털 정보를 전달하는 물리적 도구인 전선을 정보전달의 과정에서 파생된 인식의 영역을 예시하는 이미지 재현의 재료로 활용하는 독특한 기법을 보여주었다. 재현된 이미지의 표면은 촘촘한 간격으로 배치된 전선들로 인해 독특한 재질감이 형성되는데, 그러한 표면위에 강렬하게 입혀진 색채가 특별한 색감과 함께 이미지의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작품의 틀은 평면이지만 이미지의 구성은 전선을 깎아 내는 방법에 의해 구축된 조각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라인더로 가하는 압력의 정도가 그려내는 형태의 윤곽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러한 방법으로 재현된 평면이 회화적 형식미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주제를 제시하는 작가의 의도에 설득력이 부여된다.
이미지는 불명료한 대상에 실재성을 더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단으로 오랜 시간 복무해 왔다. 텔레비전이 실어내는 그 자극적인 이미지는 실재하는 것의 전송이라기보다 모호한 단서에서 시작하여 과대하게 부풀린 허상의 그림자들에 가깝다. 그것은 수용과 사고의 과정에 개입하여 관습을 만들어 내는데, 그러한 관습은 주체의 행동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인세인 박의 작품 앞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파악하기 전에 이미 미디어에서 익숙하게 봐왔던 음습한 인물들로 착각해 버리고 사고의 과정을 종결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미디어의 공격성에 대한 저항의 언어는 전적으로 새로운 시도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젊은 작가가 보여주는 날 선 비판정신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요즈음, 매스미디어가 유포하는 엄청난 이미지의 범람에 대한 관찰을 넘어 그것을 개입하는 신체 내부의 문제를 지적하는 작가의 정신은 형식에 관련된 특징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앞으로 이 작업의 행로가 형식적 프레임에 국한되지 않고 미디어의 공격적 속성과 그것에 대립하는 인식의 간극을 더욱 예리하게 짚어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고원석












2011 M.Idea 개인전 전시 서문

케이블선으로 구현된 미디어 이미지  
작가는 화면 바탕에 케이블 선을 배열해서 부착했다. 수평으로 나란히 늘어선 선들은 균질 하거나 평평한 표면이 아니라 굴곡과 깊이가 다른 피부를 만들어낸다. 인공의 오브제가 물감이나 붓대신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자개나 시퀸, 레고와 크리스탈 혹은 PVC 등의 물질로 회화적 공간을 점유하고 그 재료들을 통해 이미지를 그려 보이는 경우가 최근 빈번해졌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전통적인 회화적 재료 대신에 인공의 오브제가 낯설고 흥미로운 차원에서 혹은 시각에 더욱 호소하는 지점에서 더욱 선호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 재료의 차용에서 다분히 팝적인 기호를 엿보기도 하고 동시에 인공의 사물로 점유되고 있는 환경에 대한 일정한 반응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와 함께 좀더 색다르고 흥미로우면서 노동과 기술의 정교함을 요구하는 회화의 갈망 내지는 더욱 기계적이고 인공적인 것으로 전이되는 탈신체적 회화에 대한 욕구의 차원과도 맞닿아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인세인 박은 케이블선을 회화적 재료로 다룬다. 원형으로 단단한 이 재료는 전자이미지를 소비하는 우리의 삶의 환경에서 너무도 흔한 재료이다. 이미지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는 재료를 가공해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이미지 역시 마치 텔레비전 화면에서 빠른 속도로 흔들리며 지나가는 주사선의 배열로 이루어진 영상이미지를 닮았다. '지지직'거리는 소음을 동반하면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에 유사하다. 그 같은 이미지야말로 우리에게 각인된 이 시대의 보편적인 이미지다. 우리는 대중매체를 통해 발산되는, 전파되는 그러한 이미지를 과도하게 흡입해내면서 살고 있다.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을 현대인들은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한편 미디어가 가공시킨 이미지만을 생각하게 됨으로써 이를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은 주체성을 잃고 단편적인 사고만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의 능동적인 상상력, 사고에 의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적이고 가공적인 이미지만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다. 그 가공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텔레비전일 것이다. 동시대인들은 텔레비전이 제공하는 전파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그 이미지를 당연시하고 그로 인해 지극히 맹목적인, 수동적인 존재로 변해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눈, 망각과 신경체계, 몸 자체가 아예 그러한 기계적 이미지의 수신에 적합한 것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케이블선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화면위로 얼굴 하나가 커다랗게 떠오른다. 전선을 감싸고 있는 피복의 표면에 색을 입히고 다시 깊이가 다르게 그라인더로 깎고 갈아낸 흔적이 이미지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오브제 위로 구사되는 페인팅의 흔적은 기계적이 아니라 감정과 손, 마음의 굴곡들이 격렬하게 진동하는 편이다. 이른바 추상표현주의적인 제스처에 유사하다. 물감이 흐르고 튕기며 퍼져나간 자취들이 차가운 오브제와 주사선의 이미지를 마구 흔드는 편이다. 최근작에서 더욱 고조되는 이 표현적인 흔적은 기계적이고 수동적인 영상이미지(텔레비전이미지)의 획일성에 저항하는 듯한 몸짓으로도 읽힌다. 사실 이 작업에서 이미지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수단은 물감의 '토핑'이 아니라 케이블의 피부를 깎아내는 행위에 있다. 강도와 압력에 의해 깊게 패이면 속이 드러나 금속성이 보이고 얇게 깎으면 고무질감의 외피가 패인 자취가 드러난다. 그것이 다른 깊이, 색상, 질감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른거리는 이미지를 연상시켜준다.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다. 표면을 깎아나가면서 깊이의 층차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 '조각적 회화'는 아울러 서로 다른 색상의 케이블을 배열해서 그 위로 어두운 색을 전체적으로 입힌 후에 자동차 도료를 착색해나가고 지워나가고 깎고 다시 착색하는 여러 과정을 통해 주사선과 같은 이미지의 역동적인 상을 드러낸다. 그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얼굴이다. 그 얼굴은 명료하기 보다는 흔들리고 왜곡되고 빠르게 스치면서 멈춰 서있다. 작가 주변의 지인들이고 그저 평범한 일반인들이다. 그러나 화면으로 호명되어 얹혀지는 얼굴은 범죄자나 미아를 찾는 수배전단지의 인물상과 유사하게 보여지면서 선입견을 갖고 그 얼굴이미지를 보게 한다. 실제 사진이미지를 조작해서 영상이미지인 것처럼, 가상의 이미지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텔레비전이란 매체가 대중을 조작하는 방식의 패러디다. 미디어는 이미지를 바꾸고 조작한다. 사실 텔레비전에서 방송된 이미지/사건은 현존하면서도 동시에 부재하고, 실제적이면서도 동시에 피상적이며,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의 실제세계와 텔레비전의 영상세계, 이 두 세계는 점점 더 뒤섞여 서로를 구분할 수 없을 때까지 나아간다. 미디어가 재생산되어 원본이 되고 반대로 현실이 복사물이 된다. 텔레비전 수상기가 자칭 세계 그 자체가 되었다. 이 같은 텔레비전의 이데올로기 기능에 따라 전적으로 환영과 모조품에 의해서만 양육된 인간 유형이 등장했다. 그것이 현대인이다.

인세인 박의 작업은 오브제를 활용한 회화이자 조각적 방법론으로 이미지를 안긴다. 이 케이블선이란 결국 영상이미지를 전송시켜 보는 이의 망막에 이미지를 안겨주는, 제공해주는 결정적인 수단, 도구인 것을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케이블선 자체가 아예 이미지를 드러내버린 형국인 것이다. 사선으로 긁고 지나가는 힘들에 의해 강한 노이즈가 발생되는 것 같은 환청도 인다. 시각적인 이미지이자 다분히 청각을 자극하는 화면이다. 아울러 이 수평의 선으로 인해 감지되는 시간과 속도의 힘도 거론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화면, 그 표면은 텔레비전 화면과 매우 유사하게 보여진다. 결국 작가는 우리에게 텔레비전이 제공하는 이미지를 케이블 선을 활용해 보여준 것이다. 인세인 박은 우리에게 보편적인 볼거리이자 광범위하게 편재되어 있는 텔레비전이란 매체의 이미지 제공방식, 그 주사선의 흐름, 그리고 그러한 미디어가 제공하는 이미지의 폭력적인 편재성과 동질성으로서의 강제적 힘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선에서 그 같은 방법론과 재료를 구사하고 있다. 오늘날 미디어에서 송출되는 무수한 이미지가 우리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를 반성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박영택 2011.1